늦가을쯤 우리 하숙 고양이가 약 14년간의 지구 생활을 접고 고양이 별로 떠났다.
봄까지만 해도 건강했고 여름엔 매년 그랬듯이 밖에 나가 노느라고 다음날 아침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는데, 여름마다 소소하게 생기던 염증이 올해는 병원과 약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여름이 끝나갈 때쯤 병원에서 시한부 묘생을 선고받았다.
올 여름엔 유독 한번 나가면 집에 안 들어오고 최대한 밖에 오래 있으려고 하더니, 아마 이번이
마지막 여름이 될 거라는 걸 예감했던가 보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바깥 생활을 완전히 접고 집에서만 생활하게 됐고,
사료 먹는걸 힘들어해서 식사는 전부 유동식으로 바꿨다.
시한부 묘생 선고 이후에도 포기가 안돼서 한 동안 치료를 계속하다가, 회복될 수 있는 병도
아닌데 괜히 애만 더 괴롭게 하는것 같아서 치료를 완전히 중단하고, 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 먹이면서 얼마 남지않은 묘생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 주기로 했다.
환묘용 캔, 츄르처럼 생긴 영양제를 구입해서 먹이고, 미니 믹서기를 사서 황태 국물과
물에 불린 사료, 습식 캔을 갈아 만든 보양식을 만들어줬더니 그래도 먹는 건 꽤 잘 먹어서,
이런 식으로 현상 유지라도 하면 최소한 겨울은 넘길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됐을 때쯤
녀석이 음식을 전혀 못 먹게 됐고,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 하숙묘는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길 생활이 너무 힘들었는지 입양 되보겠다고 사람들을 졸졸 따라가다가 건널목 한가운데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고양이를 발견한 아버지가 보도까지 데려다줬더니, 도망도 안 가고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그대로 집까지 데려온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6개월이 넘은 녀석이 2,3개월로 보일 정도로 작았으니 그야말로 못 먹어서 죽지 못해 살아있던 상태.
일단 배를 채우더니 갑자기 무서워졌는지 구석에 숨어있다가 다음날 나가겠다고 졸라서 내보내줬는데,
그대로 없어져서 이걸로 끝인가보다 했더니 그 다음날 다시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외출했다가 다시 집에 들어와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하숙묘 루틴이 완성됐고, 그 패턴이
하숙묘가 떠나기 몇 달 전까지 10여 년간 지속됐다.
우리 동네에 완전히 적응한 이후, 하숙묘는 자유로운 방랑 고양이의 삶과 안전한 집 고양이의 삶을
병행하면서 나름 행복한 묘생을 영위했다.
우리 집에서 돌보는 고양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동네 주민들도 녀석을 우호적으로 대했고, 그렇게
녀석은 이웃들과의 친분과 인맥을 늘려갔다.
이 녀석이 정말 유니크했던건, 동네 주민들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가족들이 데리러 나가기 전에
혼자 집까지 찾아들어오곤 했던 점이다.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고 싶어지면, 자기한테 호의적인 이웃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면 끝.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녀석은 귀신같이 우리집을 찾아서 문 앞에 앉아있고, 이웃 사람이 고양이 대신
벨을 눌러주면 셀프 귀가 성공.
한번은 고양이를 별로 안 좋아하는 분이 녀석을 집에 데려다 주신 적이 있는데, 자신이 동물과
소통했다는 사실을 너무 신기해 하시기도 했다.
하숙묘는 여름에 공원에서 가족들과 같이 벤치에 앉아있는걸 제일 좋아했는데, 가족들하고
같이 있는것 자체도 좋지만, 자기는 '빽이 있는 고양이'라는 걸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과시하는
재미도 꽤 컸던것 같다.
몇 달간 녀석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못해주는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막상 녀석이 떠나고나니, 최소한 이제는 고통에서 해방됐을거라는 안도감과, 사는 게 참 별 거
아니구나 싶은 허무함, 14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 손으로 키운 녀석이 떠나간 허탈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다.
하숙묘가 쓰던 유품을 단계적으로 하나씩 정리하면서, 그래도 길에서 굶주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갔을지도 모르는 생명이 우리 집에 와서 1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름대로 자유롭고 행복한
묘생을 누렸고, 녀석을 기억해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 모든 게 아주 헛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추스렸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어 지금은 고양이 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우리 하숙묘가
언젠가 내가 지구를 떠날때 마중 나와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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