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총 6부작 미니 시리즈로 제작한다.

처음 얼핏 봤을때는 무슨 발레 영화가 또 나오나 싶었던 BBC 전쟁과 평화의 포스터.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나타샤 로스토바 역은 다운튼 애비에 이어 신데렐라까지

요즘 한참 잘나가는 릴리 제임스.



전쟁과 평화의 3대 주인공 중에 하나인 피에르 베주호프 역은 '12년 노예'에 나왔던 폴 다노가 맡았다.



그리고 세번째 주인공인 안드레이 볼콘스키 역은 제임스 노튼인데, 일단 공개된 사진만으로 볼때

배역에 비해 좀 어려보이긴 해도, 이미지는 셋 중에 그래도 제일 잘 맞는듯 하다. 

이외에, X파일의 질리언 앤더슨이 카메오급 조연으로 등장한다고 하고, 워낙 쪽수로 밀어붙이는 

작품이다보니 조연급에서 엑스트라까지 어마어마한 인적 자원이 투입되는 작품이 될것 같다.


이로서 '전쟁과 평화'는 1956년에 처음 영화화된 이후 8번째로 리메이크되는 셈인데, 원작이 워낙

스케일이 큰데다 영화화하기에 딱 적당한 메인 스토리(사랑과 야망, 배신과 질투, 파경과 재회 등등)

덕분에 세대를 뛰어넘는 매력적인 소재임에는 틀림없는것 같다. 

게다가 요즘 영화나 드라마나 워낙 소재가 부족해서 온 사방에서 쓸만한 재료를 긁어모아 활용하는 판에

재탕 삼탕해서 우려낼대로 우려낸 소재라도, 전쟁과 평화 정도면 일단 화제성만 따져도 중박은 칠테니까.


하지만 원작소설을 베이스로 만드는 영상물에는 언제나 위험성이 따르는데, 기존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등장 인물의 이미지를 얼마만큼 충실히 구현할수 있을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원작이 이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상태라면, 원작에 더해서 그 전작이 만든 이미지까지

염두하고 만들수밖에 없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영상물의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흥행과 수입이다보니, 이런점은 리메이크 되는 작품마다 어쩔수없이 

지고가야 하는 부담일수밖에 없다.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나폴레옹의 침공을 겪기전 생기발랄함, 전쟁의 피폐함을 겪어내고도

생명력을 잃지않은 러시아를 상징하는 나타샤 로스토바인데, 소설의 이미지에 200% 부합하는 나타샤는

이미 1956년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원작을 영상화한 최초의 작품인 1956년작 전쟁과 평화.



오드리 헵번은 후대의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순진무구한 소녀와 생기발랄한 데뷔땅뜨의 이미지를 

너무도 완벽하게 구현해서, 나타샤하면 헵번이 떠오를 정도로 캐릭터를 자기의 이미지로 박제해 버렸는데,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배우의 이미지가 원작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헵번급 캐릭터 박제의 또다른 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언 리와 클라크 게이블이 있다.)


하지만 헵번을 제외하면, 다른 두 주인공인 헨리 폰다(피에르)와, 멜 페러(안드레이)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데

원작의 이미지와 배우의 괴리감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나 피에르 역의 헨리 폰다는 배역에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보는 내내 몰입이 전혀 안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50년대 미국 영화판의 시스템을 고려해보면, 원작 캐릭터의 이미지를 살리는데 충실하기보다는, 대규모 자본을

쏟아부은 대작에 당대의 스타급 배우들을 총출동시켜서 흥행 대박을 노리는데 더 중점을 두었을거고, 그래서

시간이 지난 지금 56년판 전쟁과 평화에서 남은건 오드리 헵번의 나타샤뿐이다.




내가 본것중에 원작과 캐릭터들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했던 작품은, 구소련 시절에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이

만든 전쟁과 평화(66년작)이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자국 문학인 전쟁과 평화를 미국이 엉망진창으로 만든걸 보고 빡친 본다르추크가 

진정한 원작이 뭔지 보여주겠다고 대자본과 인력을 쏟아부어서 팔 걷어붙이고 만든 작품이니까. 


6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본다르추크 감독의 전쟁과 평화.


이 작품은 러닝 타임이 무려 7시간이 넘는 대작인데, 그래서 예전에 TV에서 방영해줄때도 4편인가로 잘라서

미니 시리즈 형식으로 보여줬던것 같다. 



66년 영화에서 나타샤 역을 맡았던 여배우인데....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 아닌가?

원작을 가장 완벽하게 영상에 옮긴 본다르추크 감독조차도 최고의 나타샤는 헵번이라고 생각했는지

나타샤 역에 헵번을 닮은 여배우를 기용했고, 역시나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헵번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긴 했지만, 기존의 나타샤 이미지에 걸맞는 여배우덕분에 세 주인공의 이미지는 

완벽했고,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역대 최강이었으니.



그리고 안드레이 볼콘스키 역 캐스팅은 이 영화가 최고였다. 

배우의 이미지가, 전투와 부상과 부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과 야망의 허무함을 깨닫고 아직 젊은 나이에 

이미 삶에 지친 안드레이역에 아주 딱 맞아떨어졌다. 

(56년작 멜 페러의 안드레이는 너무 노인 분위기고, 이번에 BBC에서 뽑은 안드레이는 솔직히 너무 젊다.)



피에르 베주호프역은 본다르추크 감독이 직접 연기했는데, 이분도 역시 역대 최고의 피에르였다.

지금까지 원작 소설의 피에르 이미지를 이렇게 똑같이 뽑아낸건 이 작품이 처음이자 끝이다.


그러고보면, 자국을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건 그 나라 사람들인것 같다. 

성질급한 이탈리아인들의 중2병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장 잘 만들어낸건 역시 

이탈리아 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였고,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제일 멋지게 영상화한건 BBC에서

만든 4부작 미니 시리즈인걸 보면. 

반대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다국적 캐스팅 영화 '제인 에어'는 동명 영화중 역대 최악. 

  



그외에 앤소니 홉킨스경이 피에르 역을 맡았던 72년작 BBC 미니 시리즈도 있고

(이건 무려 20부작인데, 드럽게 재미없었음)




이태리, 프랑스, 독일, 러시아, 폴란드 등 유럽 여러나라 합작의 4부작 미니 시리즈도 있다.(07년)

이건 '시계태엽 오렌지'로 유명한 말콤 맥도웰 옹이 볼콘스키 노공작으로 나온다는걸 빼면 딱히

끌리는데가 없는 시리즈. 


리메이크는 태생적으로 끝없이 원작과 전작에 비교될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이번 BBC 전쟁과 평화는

요즘 한참 뜨는 스타인 릴리 제임스를 전면에 내세우려고 하는게 눈에 보이는만큼, 얼마만큼 

나타샤의 이미지를 원작에 가깝게, 혹은 새로운 해석으로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나타샤는 톨스토이가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만든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러시아 소설중에

독보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등장인물이라 할수 있는데, 그래서 여배우들이 소화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절반은 인생을 포기하다시피한 안드레이에게 다시 인생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줄 정도로 생명력으로 가득찬 나타샤 캐릭터는, 예쁜 외모나 연기력 외에 뭔가가 더 필요한 배역이다.

영화에서 그 절대 기준점을 제시한건 헵번이고, 러시아인인 본다르추크조차도 그 이미지를 차용할 정도였는데 

과연 2016년 BBC가 보여줄 나타샤는 어떤 이미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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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20 10:3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정준호 2016.01.16 18:5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본다르추크 감독의 나타샤도 저는 오드리 햅번에 뒤지지 않게 보았습니다.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에도 나오는 배우죠..
    피에르의 아내로 나온 미모의 배우도 실제 본다르추크의 아내더군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3. 2017.04.05 15:0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