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주의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좀 알아도 미국 만화, 특히 마블이나 DC쪽은 세계관이고 등장인물이고 뭐고
완벽한 무지를 자랑하는 입장에서 요즘 최고의 기대작인 마블의 '제시카 존스'를 보게 됐다.
(참고로 내가 봤던 히어로 영화는 수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아이언맨 정도이고 배트맨을 제외하면 죄다
1편만 보고 그 이후는 놔버렸을 정도로 나는 히어로물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다. 그나마도 수퍼맨은 최근작이
아니라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나온,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그 수퍼맨이다.)
마블 문외한 시각의 단점은, 단일 히어로물에도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배치하고 세계관은 또 드럽게 복잡한
마블의 특성상 앞뒤 정황을 잘 모르면 작품을 심도있게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는것인데, 또 반대로 장점이 있다면
마블이고 세계관이고 다 배제하고 순수하게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를 판단할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본 '제시카 존스' 1편은 어떤가? ..........뭐야, 이거 완전 내 취향이잖아.
제시카 존스는 일단 오프닝부터가 엄청나게 스타일리쉬하다.
몽롱하니 최면을 거는듯한 배경 음악과 함께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포인트인 보라색조의 화면이 나타난다.
실사와 만화 장면을 적당한 비율로 배합한듯한 오프닝 화면 구성은 정말 멋지다.
그리고 그 오프닝을 더 근사하게 장식하는게 바로 배경 음악인데, 어느놈이 이렇게 음악을 잘 만들었나 찾아보니
'24'의 그 죽여주는 오프닝 뮤직을 만들었던 숀 캘러리....
어떤 사건을 계기로 히어로 생활을 때려치우고 사설 탐정 일을 시작한 제시카 존스.
(드라마는 제시카가 몰카를 찍는 19금 장면부터 시작되고, 동성애 장면도 나오는걸 보면 역시 애들 보라고 만든
작품은 아닌게 확실하다. 일단 분위기 자체도 너무 어둡고.)
제시카에게 소소한 일거리를 주는 사람은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 제린 호가트.
제시카는 변호사들을 위해 일하는게 싫다면서 로펌 전담 조사관 자리를 거절한 전적이 있다.
"넌 예측불가에 너무 불안정해."
"능력이 있는거지, 아무도 해결못한 8건의 일을 내가 해결했는데."
"그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불만은 전부 내가 무마시켰지."
요즘 미드는 대부분 동성애 코드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것 같다.
90년대에 나온 프렌즈 때만해도 챈들러를 게이로 오해하는건 상당한 모욕이면서 일종의 웃음 코드로 사용됐었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점점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는건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제시카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불러오는 악몽에 대한 불안감때문에 맨 정신으로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래서 항상 알콜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겉보기에는 의뢰인이 맡긴 일을 하러 나온것 같지만, 현실은 내면의 공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집을 나온 제시카.
1편의 전반부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서질듯 나약해 보이는 전직 히어로의 모습을 조영해주는데
그런 모습은 이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사람들의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한밤중에 혼자 어두운 건물의 비상계단에 홀로 앉아있는 제시카는 사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우주에 고립되어 있다.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나타난 악몽.
(킬그레이브가 나타날때마다 화면이 보라색으로 바뀌는데, 킬그레이브가 '퍼플맨'이기도 하고, 심리학적으로
보라색은 정신적 불안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혼자만의 조용한 순간에도 제시카에게 정신적인 휴식은 없다.
왜 주인공이 알콜에 쩔어 사는지 이해할수 있는 부분.
이런 제시카에게 어떤 부부가 실종된 딸인 '호프'를 찾아달라며 사건을 의뢰한다.
실종된 호프의 친구들을 만나본 제시카는 호프에게 어떤 남자가 있었다는걸 알게된다.
그 와중에 호가트가 맡긴 일을 처리하는 제시카.
전직 수퍼 히어로지만 1편에서는 별로 그런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제시카의 초능력은 술집 주인 몰카를 찍을때 비상 계단에 점프하던 장면과, 이 장면에서 살짝 보여줄 뿐이다.
(히어로물을 안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이런게 더 좋았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바로 나타나서 괴롭히는 보라색 악당 킬그레이브의 망령.
이런 일을 겪을때마다 제시카가 외우는 일종의 주문.
"버치 스트리트....히긴스 드라이브....코발트 레인..."
평론가들이 극찬을 하더니만 정말 크리스틴 리터 캐스팅은 완벽하다. 당장이라도 깨질듯한 불안정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배우가 어디 그리 흔한가. 거기다 망가진 전직 히어로, 즉, 타락천사같은 퇴폐미까지.
밤늦게 술을 찾아나선 제시카를 자기 가게로 초대하는 술집 주인 루크 케이지.
제시카가 비상계단에서 촬영하던 몰카의 주인공인데, 제시카는 결국 이 사람과 원나잇을 하게된다.
(이 사람도 마블 히어로던데 마블은 시리즈 주인공들끼리 패턴 뜨개질하는 재주가 정말 만렙인것 같다. 그리고
미국은 무슨 히어로에 환장한 나라인가....마블만 뒤져봐도 히어로 종류가 어마어마한데 거기다 디씨까지 합하면..)
50분 분량중에 30분 정도까지는 좀 지루하고 루즈하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스피드가 붙는 시점은 바로 여기부터.
호프의 실종사건을 조사하던 제시카는, 신용카드 사용기록을 추적해서 호프가 고가의 속옷과 남성 정장을
구입했다는걸 알아낸다.
그리고 '일 루소'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아가는데, 그곳은 8개월전에 아시안 퓨전 푸드 레스토랑으로
바뀌었고, 그곳 직원이 호프가 어떤 남자와 같이 왔었다는 얘기를 해준다.
"그 남자가 요구한 뒷자리엔 이미 손님이 있었지만, 제가 뭐에 씌웠는지 그 손님들을 내보냈죠."
"그리고 우리 소믈리에가 한병에 500달러나 되는 와인을 무료로 제공했어요."
"그 사람이 파스타를 주문하자 우리 주방장이 '일 루소' 주방장의 조리법을 찾아보더라구요."
호프와 같이 온 남자는 자기 뜻대로 레스토랑 직원들을 조종했고, 제시카는 그 남자가 킬그레이브라는
심증을 굳힌다.
제시카의 과거 회상 장면을 그 장소로 걸어가는걸로 표현한 연출은 상당히 신묘했다.
과거 킬그레이브는 호프에게 한것과 똑같이, 만난지 한달된 기념으로 제시카에게 비싼 속옷과 선물을 사주고,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간 적이 있다.
"마음에 들어? 그럼 웃어봐."
죽은줄 알았던 킬그레이브가 살아돌아왔다는걸 알고 혼란스러운 제시카.
호프의 부모를 찾아가 자기를 찾아가라고 추천한 남자가 누군지 추궁하고
그 남자가 킬그레이브라는걸 확신한 제시카는, 멀리 도망치기 위해 친구인 트리시를 찾아가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트리시는 유명한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로, 제시카의 외상 증후군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준적이 있다.
(원래 제시카의 친구는 제시카를 다른 히어로들에게서 구해준 캐롤 댄버스가 나와야 되는데, 넷플릭스로
넘어오면서 트리시 워커로 캐릭터를 바꿨다고 한다. 안티 히어로가 된 제시카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데는
같은 히어로 친구보다는 일반인쪽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조흔 판단이 아닐수 없다.)
"아직도 네겐 이 상황을 해결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난 이제 네가 바라는 히어로가 아니야."
그리고 제시카는 도망을 치는데....자기 양심과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치지는 못한다.
(이 드라마는 정말 음악이 죽여준다. 이것도 80년대 몽환적인 영화의 한 장면같은데, 음악도 거기 일조를 한다.)
결국 제시카는 과거에 킬그레이브와 같이 왔었던 호텔방을 찾아간다.
호텔방에는 킬그레이브의 조종때문에 5시간이 넘게 침대에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는 호프만 남아있다.
킬그레이브의 영향때문인지 격하게 저항하는 호프를 번쩍 들어서 데리고 나오는 제시카.
(이럴땐 또 히어로같이 보이네....)
호프를 자기 사무실로 데려온 제시카는, 어릴때 살던 거리의 이름을 차례대로 말하게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고, 자기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걸 인식시켜준다.
(정신과 치료에서 배운 방법인것 같은데, 제시카가 악몽을 꿀때마다 거리의 이름을 차례로 외우는게 이런 이유
때문인가보다.)
혼자 있을때는 자기도 위태위태하지만 다른 사람을 도울때는 히어로적인 강한 면모가 나오는 제시카.
이런 이유때문에 제시카는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을 그만둘수 없는것도 같다.
다른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자기 내면의 힘을 끌어내고, 결국 그 힘이 제시카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게 아닐까.
딸과 부모는 눈물의 상봉을 하고....
호프는 제시카에게 감사를 표한다.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해결한 다음 홀가분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떠나는 제시카.
그런데 제시카를 쳐다보는 호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제시카는 뭔가 잘못됐다는걸 깨닫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가방에서 총을 꺼내드는 호프.
총소리가 들리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내려가고, 제시카는 계단으로 엘리베이터를 따라잡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선의와 책임감에서 한 일이 처참한 절망으로 바뀐 현장을 목격한 제시카.
순간 공포영화로 장르를 착각하게 만들었던 장면.
부모를 사살한 호프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킬그레이브가 제시카에게 했던
한마디를 던진다. "Smile."
그리고 킬그레이브의 조종에서 벗어나 제정신이 돌아온 호프는 도와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완전히 멘탈이 깨진 제시카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연자실 건물밖으로 나가는데
......현실에서 도망치려던 마지막 순간, 다시 갈등에 빠진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한 사람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첫째는 현실을 회피하는것."
"그리고 두번째는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뭔가 행동을 하는것이다."
두번째를 선택한 제시카는 자기에게 남은 힘을 긁어모아 현실에 직접 부딪히기 위해 다시 건물로 돌아간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받은 최고의 형벌은 바로 영혼의 금고형이다.
육신에 갇히면서 영혼 상태에서 다른 영혼과 자유롭게 소통할수 있는 경로를 차단당하고, 극도로 불완전한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로만 소통해야하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수도 없고,
자기가 느끼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수도 없다.
실질적인 소통의 창구가 완벽하게 차단된채로, 인간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영혼의 상흔을 결국 혼자서
극복하고 이겨내야만 한다.
이게 바로 제시카 존스 첫번째 에피소드를 보면서 느낀 감상이다.
1편의 제목 'Ladies Night'를 보자마자 생각난 'Kool & The Gang'의 동명 타이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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