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주의
제시카 존스의 전편을 아우르는 테마는 "통제"와 "집착"이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킬그레이브의 제시카 존스에 대한 집착과, 킬그레이브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제시카의 투쟁이 드라마의 메인 스트림을 이루고 있지만, 그 외에도 "제시카 존스"는 한 시즌 내내
다양한 인간 군상의 통제에 대한 욕구와, 집착으로 인한 종속 관계를 보여준다.
1. 킬그레이브
악역이지만 이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에너지의 원천인 킬그레이브.
타고난 뇌질환때문에 자식을 일찍 잃는게 두려웠던 과학자 부모의 치료를 학대로 오해하고, 치료 과정에서 얻게된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부모에게 위협을 가해서 결국 공포에 질린 부모를 도망치게 만든 장본인.
세상 모든 사람을 조종하면서 살아왔지만, 레바를 죽인 이후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난 제시카에게 유독 집착하고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막장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백마탄 재벌 왕자가 연상되는 다소 유치한 설정이었다. "나를 이런식으로 대한건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거냐.)
제시카를 완전히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싶다는 킬그레이브의 집착은, 결국 제시카에게 제일 소중한걸 빼앗아서
그 자리를 떠날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리고,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하는 원인이 된다.
2. 제시카
일견 제시카는 킬그레이브의 조종에 희생된 피해자로 보일수 있지만, 킬그레이브가 감금에서 풀려난 이후의
희생자들은 결국 기회가 있을때 킬그레이브를 죽이지못한 제시카에게도 책임이 있다.
제시카는 가족들이 당한 교통사고에 대한 죄책감에 얽매여있고, 자신이 가족의 죽음에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호프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고, 호프의 무죄 방면에 집착한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것 외에 제시카 존스가 불완전한 히어로인 이유는 바로 상황 판단에 오류가 많다는것인데,
킬그레이브를 죽여서 추가적인 희생을 줄일수 있었음에도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더 끔찍하고 많은 희생을 냈다는
점에서, 제시카도 마냥 희생자의 입장으로 볼수는 없다.
호프의 자살은 이런 제시카의 집착을 끊어내고, 킬그레이브를 죽여서 추가적인 희생자를 만들지 말라는
극단적인 메시지이자, 자기 손으로 부모를 죽였다는 지옥같은 기억과, 킬그레이브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다.
3. 심슨
악역, 선역, 주연, 조연을 가릴것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가득한 "제시카 존스"에서 유일한 발암 캐릭터에 설정
붕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심슨이다. 이건 일단 까고 넘어가자.
킬그레이브에게 조종당해서 트리시를 죽이려 했고, 제 정신을 차린 후에 죄책감을 가진것까지는 이해할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공격했던 여자가 죽었는지 확인해보려고, 집 문을 망치로 두들겨패는건 대체 뭔가...
뭐, 여기까지도 이해가능한 범주라고 치자.
그런데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상대를 무리하게 처리하려다가 무고한 자기 동료들을 죽이고, 그 복수심때문에
제시카를 죽이려고 하는 태세 전환의 논리는 대체 뭔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짓이라지만 자기를 죽일뻔했던 남자와 엮이는 트리시도 이해가 안되고,
심슨은 뭔가 전체 흐름에서 유일하게 일관성이 실종된 캐릭터다.
심슨의 문제점은 지나친 영웅 심리다.
자기는 항상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경찰(혹은 군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자부심이 킬그레이브때문에
상처를 입은 이후, 킬그레이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서 제시카의 경고도 무시하고, 자기 능력으로 상대할수 없는
적에 대해 지극히 구태의연한 수법을 쓰다가 동료들까지 잃는다.
수퍼 히어로인 제시카의 조언이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건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볼수도 있다.
그 수퍼 히어로가 남자였어도 심슨이 자기 방식을 끝까지 고집했을까?
4. 호가트
선역보다는 악역에 좀더 가깝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캐릭터 중에 하나가 바로 제리 호가트였다.
호가트는 상당히 냉철한 동시에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고,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좀 부족하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라는 지위때문에 주변인들을 통제하고 모든 상황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데 익숙한 호가트지만,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듯한 냉혈 변호사에게도 비서인 팸에 대한 성적 욕망에 집착한다는 약점이 있다.
와이프와의 이혼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호프가 낙태한 태아의 시신을 보존해서 이용해보려는 엽기적인
시도도 하고, 최종적으로는 킬그레이브를 이용해서 목적을 이루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호가트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은 다음에서야 킬그레이브의 공포가 뭔지 깨닫고, 킬그레이브 살해 혐의로
입건된 제시카를 무죄 방면하기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변론을 한다.
5. 말콤
"제시카 존스" 등장 인물중에 제일 착하고 사람좋은 말콤이지만, 그에게도 마약 중독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사회 복지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매일 약에 취한 하루하루를 보내다못해, 결국 나중에는 약을 공급해주는
킬그레이브에게 제시카의 몰카를 넘겨주는 짓까지 하지만, 제시카의 도움과 자기 자신의 의지로 마약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고 원래의 자기 모습을 되찾는다.
약을 끊고 제 정신을 차린 말콤의 삶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는것인데, 이런 동기에서 친구가 살인 누명을 쓰지
않도록 시체를 유기하는 일까지 하는걸 보면, 이것도 일종의 집착이라고 생각된다.
6. 로빈 (쌍둥이 누나)
로빈은 쌍둥이 남동생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건 혼자가 되는게 두렵고,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방패막으로 남동생에게 의지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쌍둥이 남매는 처음엔 좀 짜증스러웠는데, 남동생은 킬그레이브때문에 끔찍한 최후를 맞고, 실종된 남동생을 찾아
헤메다가 결국 진실을 알아내고 슬픔에 빠져서 마음약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던 로빈은 정말 짠했다.
하지만 "물고기 자리를 타고난 사람은 관대하다"면서 말콤을 용서하는 장면에서, 결국 이 친구도 세상과 맞서서
홀로서기를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여성 크리에이터의 작품이라 그런지, 제시카 존스에는 페미니즘적 코드가 많이 숨어있다.
7. 도로시 워커 (트리시의 모친)
딸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10대 딸의 생활을 통제하고, 때로는 자기 뜻대로 되지않는 딸에 대한 분풀이로 물리적
학대까지 저지르던 트리시의 엄마가 집착하던 것은 딸의 성공이었을까, 아니면 그 성공에 수반되는 거대한
부였을까?
어느 쪽이든 그 집착의 댓가로 도로시는 딸에게 절연당하고, 성인이 된 딸을 만나기 위해 비밀 정보를 미끼로
이용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간신히 딸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익 추구에 대한 집착으로 딸을 질리게
하는걸 보면, 그녀가 진정으로 추구하던것이 어느쪽인지는 확실치 않다.
(트리시 엄마로 나온 배우는 레베카 드 모네이였다. 얼굴도 변하고 목소리도 변해서 배우 이름 확인하기 전까지는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아, 세월 무상...ㅠㅠ)
모든것이 끝난 다음 사무실에 돌아온 제시카의 핸드폰에는 수많은 메시지가 쌓여있지만, 하나같이
누군가의 강압에서 자기를 구해달라는 내용뿐이다.
지친 제시카는 메시지를 다 삭제해버리고, 걸려오는 전화는 말콤이 대신 받는다.
'난 너희들이 상상도 못할 악당을 해치웠는데, 너희들은 이런 사소한걸로 날 들볶겠다는거야?
이런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해!' (제시카가 메시지를 지울때의 느낌은 딱 이랬다..)
시즌 내내 제시카와 시청자를 괴롭히던 사악한 악당이 제거됐다는 통쾌함은 잠시뿐이고, 여전히 세상은
다양한 종류의 통제와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걸 보여주는 약간은 씁쓸한 엔딩.
루크와 제시카의 관계가 해피 엔딩이 될거라는 암시는 루크와 클레어의 대화에서 살짝 운을 띄우고,
결국은 파일럿에서 보여준 어두운 색조를 마무리까지 일관되게 유지했던 "제시카 존스".
약간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역시 최근 신작중에서는 제일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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